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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19. 16:59 투자
[더벨]깊어지는 불황…해운사 '죽을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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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2011.09.19 11:08 |
[머니투데이 서세미 기자][선박인도 늘고 물동량 줄어...국내 선사들 발주량 많아 투자·운영 부담 커]
더벨 이 기사는 09월15일(17:43) 자본시장 미디어 '머니투데이 thebell'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해운업계 불황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선박공급은 넘치는데 물동량은 늘지 않으니 운임은 바닥을 기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신용등급 하락과 유럽 재정위기에 따른 경기침체 우려까지 겹쳐 하반기에도 희망을 품기 어렵다.
국내 대표적인 해운사 어느 한 곳도 불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호황기 대거 발주한 선박을 인수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 만만치 않다. 운임이 워낙 떨어진데다 운송수요마저 없어 운영부담 역시 상대적으로 크다.
대형 컨테이너선이 주력인 한진해운은 신조선박에 대한 투자부담이 크다. 현대상선은 부쩍 높아진 용선료가 부담이다. STX팬오션은 벌크선 시황의 극심한 침체로 고생하고 있다. SK해운 역시 2013년까지 재무부담의 증가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NICE신용평가는 14일 '해운업 시황 및 Credit Risk 점검' 보고서를 통해 국내 해운사의 신용 리스크가 연초보다 상승했으며 높은 산업위험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한진해운 STX팬오션 SK해운 현대상선 등, 투자·운영부담 커
한진해운의 재무안정성이 악화되고 있다. 지난해 말 247.4%였던 부채비율이 올해 6월말 기준 354.3%로 100% 넘게 상승했다. 예상보다 운임 하락이 컸던 탓도 있지만 선박 11척을 인수하면서 차입금이 1조 2740억원 증가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21척의 선박에 대해 발주계약을 맺고 있어 잔여 투자부담도 약 1조3000억원(12억 달러)에 달해 과중한 수준이다. 다만 신조선박의 3분의 2(척수기준)에 대해 선박금융이 체결돼 있다. 한진해운은 선박투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감천터미널 부지를 비롯한 자산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현대상선은 다른 경쟁사들보다 선박투자를 적게 한 덕에 투자부담은 낮은 편이다. 올해 상반기까지 벌크선 4척에 대한 계약만 체결한 상태라 잔여 투자부담이 2000억원 수준에 머물렀다. 지난 8월 컨테이너선 5척을 추가로 발주했으나 부담이 크지는 않은 상황이다.
문제는 용선료다. 2008년까지20% 미만이었던 용선료/매출액 비율이 올해 상반기 32%로 증가했다. 특히 현대상선이 주력하는 컨테이너선은 대부분 장기계약으로 빌려주기 때문에 용선료 조정이 쉽지 않다. 경기침체로 물동량이 줄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영업실적 부진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STX팬오션은 매출비중의 80%를 차지하는 벌크선 특성상 단기용선 비중이 높아 용선료 조정이 탄력적이다. 신규 발주한 선박은 이미 사용처와 목적이 정해져 운용부담역시 낮은 수준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투자부담은 큰 것으로 판단된다. 올해 상반기 기준 무려 62척의 선박을 발주했지만 운임지수가 곤두박질치면서 영업현금 창출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NICE신용평가의 구본욱 선임연구원은 "단기운송매출 비중이 높은 사업특성상 시황이 부진할 때 유가상승에 대한 대응능력이 상대적으로 낮다"며 "공급과잉으로 인해 벌크선 부문의 시황침체 지속기간이 예상치를 상회하고 있어 단기적으로는 수익성 개선이 어려울 것"이라 내다봤다.
올해 상반기 선박연료유(벙커C유) 평균가격은 지난해 동기간보다 31%가량 상승해 유류비 부담이 크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STX팬오션의 연료비/매출액도 약 10%정도 늘어났다.
SK해운의 경우 장기운송계약과 벙커링 사업의 매출비중이 80%로 사업안정성이 우수한편이라 불황에도 양호한 영업수익을 기록했다. 올해 상반기 다른 대형 선사들은 영업적자를 기록했음에도 7.6%의 세전영업이익(EBITDA)마진을 달성했다.
그러나 용대선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영국 현지법인의 실적부진으로 부채비율은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08년 이후 차입금 규모가 꾸준히 늘어나면서 올해 상반기 부채비율이 451.9%를 기록했다. 해외영업자회사와 선박취득을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기업까지 포함할 경우 부채비율은 845.4%로 치솟는다.
SK해운은 올해 상반기 총 18척의 선박을 발주했으며 해외 현지법인도 7척의 벌크선을 발주하고 있다. 잔여투자금액은 약 1.6조원으로 선박인도가 마무리되는 2013년까지는 재무적 부담이 증가될 것으로 전망된다.
구 선임연구원은 "장기운송계약이 체결돼 있거나 대선상대방이 확정된 8척을 제외하면 고정거래처가 확정돼 있지 않아 신조선에 대한 중장기적인 운용상 부담이 있다"고 지적했다.
◇ 중장기적으로도 시황 개선 가능성 낮아…해운업계 신용위험 상승
미국의 더블딥 가능성, 유럽의 재정위기로 선진국 경기침체가 예상되고 있어 해운업계의 불황은 지속될 전망이다. 지난해 컨테이너부문 실적이 개선되면서 해운사들이 신조 발주를 늘린 점도 부메랑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향후 선박공급이 증가하면서 운임회복이 지연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건화물선 부문 역시 2009년에서 올해 상반기까지 신조선 인도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선복량 증가는 내년까지 물동량 증가를 상회할 전망이다. 운임 약세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탱커선의 경우엔 상대적으로 선박 공급증가에 따른 부담은 크지 않은 수준. 그러나 주요 선진국의 경기 둔화로 물동량의 큰 폭 증가를 기대하기 어려워 역시 단기적으로는 운임개선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다.
해운시황 침체가 장기화될 경우 투자부담이 큰 해운사의 경우 신용위험이 크게 상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호황기에는 발주금액의 80% 이상을 리보(Libor)와 유사한 낮은 금리로 선박금융이 가능하지만 시황침체기에는 신용경색으로 선박금융을 이용하기 쉽지 않다. 선박가치가 하락할 경우 금융기관에서 추가 담보를 요구할 수 있어 재무적으로 풍족한 기업이 아니면 차입금을 조기상환해야 하는 부담도 발생할 수 있다.
구 선임연구원은 "단기용선 위주의 탄력적인 선대운용을 하고 있거나 장기운송계약 위주의 사업을 영위하는 선사의 경우 영업실적 저하의 폭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대규모 투자부담이 있거나 해외 관계사로 인한 부담이 있는 경우에는 신용위험 상승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
2011. 9. 18. 14:57 아무거나
[아이폰 게임] STREET FIGHTER Ⅳ VOLT 스트리트 파이터4
2011. 8. 31. 22:08 카테고리 없음
김태희 하이컷 화보
2011. 8. 28. 01:58 좋아하는 음악
마일스 데이비스의 생애
마일스는 현재에 유행하는 음악에 민감했고 시대 상황에 예의 주시할 줄 아는 아티스트였다. 단지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일반 뮤지션의 범주에서 논할 수 없는 가히 ‘대가’였다. 본명 마일스 듀이 데이비스 주니어인 그는 1926년 5월 25일 일리노이주 알턴에서 태어났다. 치과의사인 아버지를 둔 중산층의 유복한 가정환경에 자라나 이스트 세인트루이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13세가 되던 생일 아버지가 사주신 트럼펫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트럼펫 훈련을 받게 된다.
16세때 부터 바(Bar)에서 주말마다 연주를 한 마일스는 지역 밴드인 ‘에디 랜들스 블루 데빌스’의 멤버로 활동하다 17살이었던 1944년 비밥(Bebop)의 혁명을 몰고 온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가 활동하던 ‘빌리 엑스타인 빅 밴드’가 그가 살던 이스트 세인트 루이스에 순회공연을 오게 됐고, 마일스는 우연한 기회에 그들과 한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때의 경험은 그가 길레스피와 파커의 추종자가 됨을 물론 비밥의 스타일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스피디한 연주, 두드러진 즉흥 솔로, 복잡한 리듬감으로 어우러진 비밥은 40년대 재즈계를 강타한 ‘재즈혁명의 전주곡’이었다. 젊은 재즈 연주자들은 모두 비밥에 심취해 있었고 마일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비밥을 추종하는 트렌드의 수혜로 그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 해 이스트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뉴욕에 있는 줄리어드음대에 입학한다.
줄리어드음대를 다니면서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뉴욕 52번가의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라는 재즈 클럽이었다. 매일 밤 이곳에 나가 음악을 듣고 또 그곳의 전통에 따라 무대에 돌아가며 올라가고 하면서 재즈 트럼펫 연주의 정체를 깨닫는다. 1947-48년 동안 찰리 파커의 밴드에서 활동하게된 마일스는 이를 통해 비밥의 문법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익힌다.
1948년 여름 마침내 마일스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9인조 빅 밴드를 조직한다. 뉴욕에서 만난 캐나다 출신의 작곡가 길 에반스(Gil Evans)를 비롯한 미국 서부 출신 백인 재즈 연주자들을 기용, 이듬해인 1949년 캐피톨(Capitol)을 통해 발표된 앨범 <Birth Of Cool>은 재즈의 바탕에 백인적 감수성을 가미시킨 걸작이었다.
이 앨범은 ‘쿨의 탄생’이란 제목이 입증하듯 이후 당시 앨범에 참여했던 리 코니츠, 제리 멀리건과 같은 뮤지션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 웨스트 코스트를 중심으로 한 ‘쿨’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개척하는 데 씨앗을 뿌린 재즈사(史)의 명반이었다. 이 음반이 녹음된 당시엔 재즈계의 촉각이 비밥에 쏠려 있던 시기라 아무도 마일스의 시도에 주목하지 않았다가 1957년 2월 캐피톨사가 이 앨범을 재발매하면서 마침내 그의 진가가 인정받기에 이른다.
1950년대 초반 잠시 헤로인에 중독된 마일스는 위기를 맞지만 이후 프레스티지(Prestige) 레이블을 통해 수많은 음반을 발표한다. 테너 색스폰 주자 존 콜트레인과의 협연으로 유명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Miles Davis Quintet)의 시작을 알렸던 시기인 프레스티지의 내공축적 시절 동안, 마일스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그의 대표작으로 반드시 입에 오르는 ‘Round midnight’를 1955년 7월 뉴 포트 재즈페스티벌서 연주하게 되었고 이를 도화선으로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한다. 트럼펫의 마일스 데이비스를 비롯하여 테너 색스폰의 존 콜트레인, 피아노에 레드 갈런드, 베이스에 폴 챔임버, 드럼에 필리 조 존슨으로 구성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같은 해 10월 콜롬비아 레코드 데뷔작 <Round Midnight>를 발표, 그의 음악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에서 첫 앨범을 내놓았지만 아직 프레스티지 레코드와 5장의 음반에 대한 계약 분이 남아있었기에 마일스는 잔여 분을 해결하기 위해 단 이틀만의 전대미문 세션을 통해 녹음 작업을 마치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나온 작품이 <Relaxin> <Cookin’> <Workin> 그리고 <Steamin’>이었으며 이 음반들 모두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전작 <Round Midnight> 이상의 호평을 받는다.
1957년 <Birth Of Cool>의 재발매와 동시에 그는 이전 음악 동료인 길 에반스와 다시 만난다. ‘쿨의 탄생’에서 보여준 빅 밴드 편성을 다시 도입, 길 에반스의 클래시컬한 편곡으로 ‘쿨의 탄생’에서 진일보한 연주를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1956년의 <Miles Ahead>와 이듬해 <Porgy & Bess> 그리고 1960년의 <Sketches of Spain>이 모두 마일스와 길 에반스와의 공동의 땀으로 결실을 맺은 명작들이었다.
1957년 12월에는 파리를 방문,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의 거장 루이 말 감독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L’Ascenseur pour l’Echafaud )의 스코어를 맡았으며 이 영화음악으로 1960년 그래미상 베스트 재즈 퍼포먼스부문 후보에 오르는 성과도 거둔다. 1958년에는 존 콜트레인과 함께 했던 그의 퀸텟에 알토 색스폰 주자인 캐논볼 애덜리를 영입, 6인조로 새로 출발하여 <Milestone>을 녹음한다.
재즈에 모드(mode: 각 스케일, 노트에서 일곱음을 모두 사용하는 연주 방식) 주법을 처음 도입한 이 앨범을 끝으로 밴드 내의 피아노 주자 레드 갈란드가 떠나고 모드에 정통한 피아노 주자 빌 에반스(Bill Evans)가 들어오면서 그의 팀의 색깔은 더욱 ‘모드’로 진행되었다. 모드 주법의 본격적인 시도를 알렸던 그의 대표작 <Kind of Blue>(1959)는 ‘드림팀’이라고 할 만한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된 이 밴드연주의 정점이었다. 이 앨범은 코드 변화와 즉흥연주 중심의 기존 재즈음악 스타일을 과감히 벗은 ‘모던 재즈’(modern jazz)의 시작을 알렸으며 지금까지 200만장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도 포획했다.
1960년대 초반 솔로 활동을 위해 존 콜트레인과 빌 에반스가 마일스의 6명 밴드을 떠나고 이들을 대신할 피아노 주자 윈튼 켈리와 색스폰 주자 행크 모빌이 들어온다. <Kind Of Blue> 때와 같은 창조성은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대중들과의 친화력을 더 높아졌으며 <Someday My Prince Will Come>(1961)과 같은 수작 생산을 거르지 않는다. 6명의 밴드를 떠난 빌 에반스와의 작업을 이후에도 지속하여 같은 해 내놓은 앨범 <Live At Carnegie Hall>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라는 젊은 색스폰 주자가 ‘프리 재즈’를 선보이면서 재즈 음악계는 어느덧 ‘프리 재즈’ 쪽으로 말을 갈아 타고있었다. 마일스는 이런 오넷 콜먼의 시도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고 마일스의 활동이 다소간 시들해진 60년대 중반, 다시 퀸텟으로 밴드를 재편했다. 이 때의 명분은 반(反)프리재즈에 입각한 듯한 재즈-스탠더드 풍의 전통에 입각한 새로운 시도’였다.
베이시스트 론 카터,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드러머 토니 윌리엄스, 테너 색스폰에 웨인 쇼더와 같은 젊은 피를 수혈받으며 마일스의 쿼텟은 <Kind Of Blue> 이후 최고의 창작력을 다시 불태운다. 1965년 <E.S.P>를 시작으로 <Miles Smiles>(1966), <Sorcerer>(1967), <Nefertiti>(1967), <Miles In The Sky>(1968), <Fills De Kilimanjaro>(1968)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 이중 <Miles Smiles>는 1967년 그래미상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거뒀고,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이 참여한 <Miles In The Sky>와 칙 코리아의 일렉트릭 피아노가 참여한 <Filles De Kilimanjaro>는 얼마 후 마일스의 또 한차례 혁명인 ‘재즈-록 휴전’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작품이었다.
1968년 마일스는 제임스 브라운, 슬라이 & 더 훼밀리 스톤, 지미 헨드릭스 등 당시 대중들을 휘어잡은 R&B와 펑키 음악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후 지미 헨드릭스를 만나게 되었고, 둘은 함께 작업할 것을 약속한다(물론 이 약속은 지미 헨드릭스의 요절로 이뤄지지 못했다.)마일스는 당시 유행하던 록 음악의 열풍을 예의 주시했고, 일렉트릭 기타와 키보드가 재즈의 진보를 이끌어낼 것으로 판단한다.
콜트레인의 죽음 후 재즈는 기존 프리 재즈에서 더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고, 수요층 측면에서 어느덧 백인 지식인이나 상류층들이 즐기는 음악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1968년 말 그의 두 번째 퀸텟은 해산을 맞아 색스폰 주자 웨인 쇼더를 제외하고 모두 솔로로 독립한 상황이었지만 마일스는 또 다시 새로운 시도를 감행함으로써 존재를 부각한다.
토니 윌리엄스를 대신 할 잭 드자넷, 론 카터를 대신할 데이브 홀란드, 일렉트릭 건반주자 칙 코리아, 조 자위눌이 마일스와 함께 연주를 하게 되고, 영국 출신의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도 그의 밴드에 합류한다. 이들과 함께 1969년 2월에 녹음한 <In A Silent Way>는 코드 없이 부유하는 듯한 멜로디로만 진행된 방식으로서, 거기에 일렉트릭 기타사운드를 집어넣어 ‘록’적인 요소를 재즈에 본격적으로 가미한 것이었다.
같은 해 8월 재즈계의 최대 문제작인 <Bitches Brew>이 녹음되어 1970년 3월 세상에 나왔다.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도저히 옮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즉흥성에 토대를 둔 이 앨범에서 마일스의 트럼펫은 전기 코드를 꽂은 듯 우렁찼으며 일렉트릭 피아노와 일렉트릭 기타의 펑키(funky)감과 드럼의 강한 비트는 바야흐로 재즈-록 휴전(Jazz Rock Fusion)의 출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미 길이 갈라선 록과 재즈의 융합을 꾀한 이 기념비적 가치의 앨범은 발매되자 마자 골드를 기록했고 빌보드 Top40에 오르는 인기를 누려 대중들에게 다가가려는 취지를 충분히 달성했다.
마일스의 재즈-록으로의 실험은 이후 5년 간 계속된다. 라이브 실황을 담은 <Miles Davis In Filmore East>(1970), <Live-Evil>(1970)를 비롯하여 흑인 권투선수 잭 존슨에게 헌정하는 <Tribute to Jack Johnson>(1970), 슬라이 스톤과 제임스 브라운으로부터 영향 받은 게 명백한 펑키 리듬의 <On the Corner>(1972)와 같은 ‘재즈-록 휴전’의 명반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가 시도한 재즈-퓨전은 잇단 재즈 슈퍼그룹의 출현을 몰고 왔다. 칙 코리아는 1970년 말 마일스를 떠나 써클(Circle)을 거쳐 1971년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를 결성했으며 기타주자 존 맥러플린도 같은 해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를 만들었다. 마일스에게 일렉트릭 피아노를 소개했던 조 자위눌과 색스폰 주자 웨인 쇼터는 그들 보다 더 빠른 1970년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를 결성하면서 1970년대 재즈의 대세를 재즈-록 퓨전으로 돌려놓았다.
건강상의 이유로 1975년 마일스는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확히 6년 후인 1981년, 일렉트릭 베이스에 마커스 밀러, 일렉 기타에 마이크 스턴, 색스폰에 빌 에반스 등 젊은 재즈 뮤지션들로 완비된 밴드와 함께 재기해 <The Man With The Horn>을 발표한다. 이어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를 가입시키고 자신이 직접 표지그림까지 완성한 <Star People>(1982), <Decoy>(1983), <You’re Under Arrest>(1985)를 연달아 내놓으며 에너지를 과시했다.
30년 동안의 콜롬비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1986년 워너로 이적하여 <TuTu>를 선보인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주교의 이름을 따온 이 앨범은 토미 리푸마, 마커스 밀러, 조지 듀크 등 3인 프로듀서의 지휘 아래 만들어졌고, 마일스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던 마커스 밀러가 작곡과 편곡을 맡았다. 일렉트릭-펑키 풍의 편곡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흑인 로커 프린스(Prince)의 영향을 느끼게 했다. 이듬해 1987년 워너 브라더스에서 두 번째로 내놓은 <Siesta>는 엘렌 바킨, 줄리앙 샌즈 주연의 동명 영화 음악으로 작품 전체가 예전 길 에반스와의 작업 <Sketches Of Spain> 때와 같이 스페니시한 연주로 가득 차있다.
마일스는 사망하기 직전인 1991년 7월 스웨덴에서 열린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서 연주자로 참여, 그의 음악적 동반자로 1988년 세상을 떠난 길 에반스와 녹음했던 많은 곳들을 재즈팬과 평론가들 앞에서 재현하며 엄청난 환호의 박수를 받았다. 꿈꾸던 재즈의 진보를 평생동안 실현해온 마일스는 1991년 9월28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소재의 세인트 존스 호스피탈 앤 헬스 센터에서 폐렴에 의한 호흡곤란과 뇌졸중으로 숨을 모았다. 사망 후 완성된 2개의 트랙이 포함된 스튜디오 앨범 <Doo-Bop>이 1992년 공개되면서 위대한 재즈맨을 잃은 상실감에 젖은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마일스는 ‘모든 음악적 요소’를 그에 트럼펫에 담아 내려했고,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뮤지션이 되길 원했다. 비밥의 출현 때부터 재즈의 중심에 있어오면서 기존의 전통을 답습하기보다는, 재즈-스탠더드를 바탕으로 현재의 음악흐름을 늘 주시했고 거기에서 항상 새롭고 실험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마일스에게 ‘재즈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임에 있어선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 에반스와의 작업과 재즈-록 퓨전을 시도할 당시 일각의 재즈평론가들로부터 ‘백인에게 아부하는 재즈 뮤지션’ 혹은 ‘재즈를 팔아먹었다’는 식의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근거 없는 비판은 이미 루이 암스트롱이나 듀크 엘링턴과 같은 대가들도 경험했던 얘기들이었다.
마일스의 시도는 그의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더 접근하고 싶어 한 그 만의 것이었다. 마일스는 자신의 공연을 할 때 젊은 흑인관객과 눈이 마주치길 원했고, 그런 흑인 청중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보내었다.(하지만 물론 지금까지 그의 음악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 백인들이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 음악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념과 인종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음악만큼이라도 퓨전되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과 명언은 어느덧 재즈는 물론이고 현대의 대중음악을 가로지르는 음악트렌드가 되었다.
2011. 8. 25. 08:36 아무거나
스티브 잡스 사임하다...(전설로 남을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가 애플 CEO 사임을 발표했네요..후임자는 팀 쿡
건강상의 이유가 크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 할듯..업계에 미치는 파악효과도 상당할 텐데..
시기적으로는 애플이 어수선한 때이지만 잡스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타이밍에 물러나는듯...
애플을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어 놓고 쿨하게 퇴장하네요..
스티브 잡스가 애플 이사회에 보낸 마지막 편지입니다.
I have always said if there ever came a day when I could no longer meet my duties and expectations as Apple’s CEO, I would be the first to let you know. Unfortunately, that day has come.
I hereby resign as CEO of Apple. I would like to serve, if the Board sees fit, as Chairman of the Board, director and Apple employee.
As far as my successor goes, I strongly recommend that we execute our succession plan and name Tim Cook as CEO of Apple.
I believe Apple’s brightest and most innovative days are ahead of it. And I look forward to watching and contributing to its success in a new role.
I have made some of the best friends of my life at Apple, and I thank you all for the many years of being able to work alongside you.
Steve
2011. 8. 20. 17:40 펌질
초딩들의 경제 걱정
2011. 8. 20. 16:55 내가 읽은 책
마이클 코넬리의 "블러드 워크"
마이클 코넬리의 소설중 제일 유명한 "시인"을 먼저 읽을려고 했는데 그건 어느 블로그에서 범인을 밝혀주는 스포일러를 읽어버리는 바람에
-_-; 시인의 범인은 XXX 이었다. 아무튼 ㅋㅋ...
블러드 워크는 사소해 보이는 강도사건에서 시작해 주인공인 매캐일렙 자신과 연관된 연쇄살인사건에 대해서 그리고 있는데, 중반까지는 사건배경과 밝혀가는 과정이 지루하게 전개해 나가는데 중반이후 부터는 작품 몰입도가 장난이 아니다. 후반에 단숨에 읽어버림..나중에 범인이 좀 너무 허무하게 죽긴하지만..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의 범죄 담당 기자출신 답게 FBI 내부의 조직과 수사방법등을 디테일 하게 다루고 있고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법이 억지스럽지 않고 정황상 맞게 떨어지고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평점은 10점 만점에 7점 정도??
2011. 8. 20. 14:16 펌질
HP의 ‘폭탄선언’은 아이패드 때문
전 세계적으로 10만대밖에 안 팔여서 레어 아이템이 되겠군..중고 시장에서도 구하기 힘들것 같아..ㅋㅋ
당분간은 애플과 안드로이드 업계의 2파전으로 진행될듯. 다른 업체들은 신제품 내 놓을수록 안쓰러운 상황만 겪게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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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의 ‘폭탄선언’은 아이패드 때문?
결국 HP가 PC 사업에 등을 돌리게 된 것에는 터치패드의 실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물론 PC 시장에서 애플을 제외한 대부분의 PC 제조사들의 수익이 크게 둔화되고 있고, HP가 오랫동안 사업 분사를 요구받아 왔다는 점에서 이 같은 결정은 일견 예상된 면도 있었다.
반면, 애플의 태블릿PC 아이패드는 출시된 지 28일만에 100만대를 돌파했고, 두 달만에 200만대를 넘어서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 왔다. 지금도 매 분기마다 900만 대 가량의 판매고를 올리며 승승장구 하고 있다. 최근 펀드운용사 로버트W.베어드가 1100명 이상의 태블릿PC 잠재 구매자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94.5%가 아이패드를 사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한편, IT 전문 매체 매셔블(Mashable)은 아이패드의 다음 희생자가 림(RIM)의 ‘블랙베리 플레이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앞서 미국의 통신사 스프린트가 플레이북의 4G 버전을 판매할 계획이 없다고 밝혀, 플레이북의 판매에도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