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위기설, 무엇을 남겼나… 두달간 실체없는 공포에 금융시장 초토화
환율방어에만 외환보유액 200억弗 축내… 결국 국내 투자자 '눈물' 외국인만 배 불려
이번에도 ‘설(說)’뿐이었다. 온 나라를 ‘환란’공포로 몰아넣었던 ‘9월 위기설’은 최대 고비였던 외국인보유 채권만기일(9~10일)을 무사히 넘기면서 결국 자연 소멸됐다. 외국인들은 한국시장을 집단이탈하지 않았고, 외환부족사태도 없었다.
피해가 없었던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위기설의 유령에 끌려 다니며 나라경제 전체가 뿌리째 휘청거렸던 지난 몇 달을 되돌아보면 ‘과연 한국의 시장, 한국의 투자자들은 환란 때보다 나아진 것이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9월 위기설 파동의 책임이 정부, 시장, 투자자, 언론 모두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한단계 성숙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11일 금융계에 따르면 9월 위기설로 인해 우리경제가 입은 손실만도 어림잡아 100조원이 훨씬 넘는다. 위기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6월말 이후 주식시장 시가총액은 무려 110조원이나 허공으로 증발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주가하락이 모두 위기설 탓은 아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이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며 “결국 수많은 개인주식투자자, 펀드투자자들이 위기설로 인해 재산손실을 입은 셈”이라고 말했다.
환율방어를 위한 시장개입으로 외환보유액도 150억달러 이상(약 17조원) 사라졌다. 지난 두 달간 시장개입금액은 200억달러를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반면 외국인들은 9월 위기설 와중에 오히려 상당한 이익을 챙겼다. 가장 많은 채권만기가 몰려있던 10일 하룻동안 외국인들은 대량 처분후 한국시장을 떠날 것이란 위기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6,000억원이 넘는 채권을 순매수했다. 이달 들어 10일까지 외국인들은 모두 2조원이 넘는 채권을 순매수했는데, 위기설로 인한 금리상승 덕분에 평소보다 높은 8%대의 수익률을 보장 받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9월 위기설은 국내 투자자들에겐 손실을 떠안기고, 외국인들의 배만 불린 셈이다.
그러나 누굴 탓할 수도 없다. 화(禍)를 자초한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2,400억달러의 외환보유액을 가진 나라에서 70억달러 정도의 외국인채권 때문에 환란이 올 것이란 위기설은 애초 가설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투자자들은 사실보다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며 특유의 ‘쏠림’현상을 보여줬다. 외환ㆍ주식시장은 작은 충격에도 들끓는 특유의 냄비근성을 또다시 드러냈다.
시장이 흔들리면 정부라도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당국은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진 뒤에야 허겁지겁 소화기를 들었다. 언론보도 역시 춤을 췄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연구원은 “금융은 신뢰와 같은 무형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소문에도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며 “정부가 시장에 정확한 정보를 주고 해외언론이나 오피니언 리더와도 소통하는 등의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9월 위기설은 아직도 우리 경제가 ‘환란’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성태 한국은행총재도 이날 “외환위기로 한국경제가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심리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면서 우리시장에 남아 있는 ‘환란 트라우마’(큰 외상으로 인한 스트레스장애)현상을 지적했다. 진정 위기를 막으려면, 부풀려진 위기설에 쉽게 휘둘리는 시장체질과 정부자세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